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셜 플랜 (문단 편집) === 외교사/안보사적 평가 === 마셜 플랜은 지금도 미국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압도적 우위를 잡게 되는 냉전 초기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로 거론된다. 20세기 후반 등장한 수정주의 성향의 서방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마셜 플랜의 근본적 동기와 전체적 효율성에 대한 의구심이 거론되기도 했다. 마셜 플랜을 통한 이익들은 사실 시장이 경제 성장을 통해 안정될 수 있게 한 신 무간섭주의 정책에 의한 이익들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이 수정주의의 요지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이 계획이 정작 미국에는 별 이익이 없고 타국에 미국 세금만 들이부은 정책이라며 외국의 추락한 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경제는 도외시한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냉전]]기 전체를 놓고 보면 너무 근시안적인 분석으로, 전후 폐허가 된 [[서유럽]]과 [[남유럽]], [[북유럽]] 지역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막대한 외부 지원이 필요했고 미국은 이들이 이미 [[철의 장막]]에 포박된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권으로 넘어가는 걸 막고 서유럽에서 자유주의 체제를 지켜낼 필요가 있었다. 특히 냉전 시대 유럽은 미국과 소련 양축의 두 초강대국의 최우선 이권 지역이었고 유럽 국가들을 재건해 자유국가이자 미국과 동맹인 국가로 만들고 이들을 소련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하는 것은 미국의 외교와 안보 모두에 중요했다. 게다가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막대한 경제 부양 효과를 본 것도 사실이었다. 어찌보면 유럽의 참화로 얻은 혜택을 유럽에게 돌려준 셈이다. 그렇게 마셜 플랜으로 인해 미국은 소련의 [[대서양]]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통해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냉전기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미소 간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1차 전선은 유럽이니 본토인 미국에 바로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방파제의 역할을 해주었다. 또 최전선에 배치된 [[그리스]]와 [[터키]]를 미국의 우방국으로 만들었는데 [[그리스 내전]]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그리스와 [[보스포러스 해협]] 통행과 카르스 요구로 소련의 큰 압력을 받던 터키를 우방으로 만들며 소련의 [[지중해]]로의 영향력까지 완전히 차단했다. 더 나아가 [[터키]]는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세 축을 형성해 중동세계 전체에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할 기반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이 두 국가는 여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산업 기반도 전무하다시피 하고 경제 효율성도 상당히 떨어져 지나치게 큰 돈이 소모돼 비판을 받기도 한다. 어쨌든 이 마셜 플랜으로 유럽을 야금야금 잡아먹으려던 [[소련]]의 계획이 확실히 저지되었다. 한편 마셜 플랜 원조를 받던 [[네덜란드]]는 이 원조액 중 일부를 미국의 허락 없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전쟁 비용으로 멋대로 사용하여 미국과 소련을 자극하였는데 결국 이것 때문에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독립을 시켜줘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와 달리 미국이 네덜란드를 압박한 것은 베트남과 달리 인도네시아는 지리적 위치상 소련이 공산주의를 퍼뜨리는 것이 쉽지 않고, 독립 진영의 지도자였던 [[수카르노]] 역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탄압하면서까지 반공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1993년 소련의 해체를 전후해 구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각지의 기밀문서들이 기밀 해제되고 영어를 비롯한 자유진영 각국의 언어들로 번역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현대 사학계는 전통주의, 수정주의, 후기수정주의 모두 마셜 플랜을 [[냉전]]의 본격적 시작점으로 재평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 기밀문서들에서 1945~47년 시점에서 스탈린에게는 자유 진영과 대결할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을 방치했었다면 자생적으로 사회주의가 자리를 잡을 가능성도 있었고 [[소련 공산당]]도 분명 이를 기대하긴 했으나 기밀문서들에 의하면 소련 지도부는 자국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중시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소극적 자생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지원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경우 미국의 요청으로 [[만주국]]과 북위 38도 이북의 [[한반도]] 지역에 진주한 후 적화를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마셜 플랜 이전 시점인 1946년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다만 1947년 이전 소련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하기할 소련의 체면치레성 지원의 사례 중 하나로 파악되기도 한다.] 서유럽을 비롯한 타 지역으로의 확장에는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치레 정도를 제외하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2차 대전 종전 시점까지 획득한 소련의 유럽 내 세력권을 완충지로 만들기 위해 적화하는 데 가용 자원을 집중 투자하던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 소련은 [[독소전쟁]]을 매우 의식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서쪽 유럽 방향의 완충지가 부족해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에 수도인 모스크바 인근 지역까지 밀리고 제2의 도시인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가 포위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련은 자국의 안전은 유럽 지역 러시아의 안전이라고 생각해 동남아시아, 중동, 라틴 아메리카 등의 지역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련이 이들 지역들에 단순히 "사회주의 형제"로서의 관심과 지원 수준이 아닌 국익의 확보를 위한 이권 지역으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마셜 플랜 이후였다.[* 마셜 플랜 이전부터 어쨌든 "사회주의 형제"인 중국공산당을 지원하고 있었고 38도선 이북 북한 지역에 대한 적화 작업도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다만 만주나 한반도 북부를 비롯한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 투사는 미국의 한반도 진주 요청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확보할 수 있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후 마셜 플랜에 대한 대응을 겸해 이전부터 지원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여 전 중국의 사회주의화라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고무되어 북한의 [[김일성]]과 베트남의 [[호치민]]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6.25 전쟁]]과 [[인도차이나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외에도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자들이나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아랍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지원도 마셜 플랜 이후 크게 확대됐다.] 자신들의 안보가 확보되고 미국에 대한 군사적/전략적 열세가 충분히 만회되기 전까지는(충분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산업생산 능력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세력권 바깥에서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충돌[* 소련은 독일에 의해 본토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큰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 제국에 의해 이뤄진 진주만을 비롯한 하와이 일부 지역에 대한 공격이나 제트 기류 풍선 폭탄 공격 정도를 제외하면 본토에 입은 피해가 사실상 없었고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가진 국가였다. 때문에 전략적 열세를 직감한 소련이 미국에 유화적 태도로 나온 것이었다.]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로 1947년 이전에는 그리스와 터키의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마셜 플랜 이전의 소련이 타 지역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려운 게, 여기서 소련이 타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을 아예 무시하게 되면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자국의 인민들 사이에서도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신이 깎여나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자국의 자원을 소모한다는 것과 미국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은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최고위층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적당히 체면치레 정도만 하고 미국의 심기는 거스르지 않는 지점을 찾기 위해 애를 쓴 기록들이나, 미국에 보낸 협조와 이해를 요청하는 외교적 요청을 담은 문서들 또한 남아 있다. 물론 일본 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등 열강 제국의 해체에 뒤따른 세계 각지의 힘의 공백 상황에서는 이런 소련의 체면치레를 위한 요식적 지원 행위조차도 기존 서방 제국들 입장에서 위협 행위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동맹국인 미국 또한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불어 소련의 이런 구상 자체는 "결국 고도로 발달된 세계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자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은 서로 싸우다 자멸할 것이고 이렇게 자본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은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마르크스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사회주의의 환상에 기인한 점이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을 통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이런 믿음을 더욱 구체화했는데 스탈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결국 마지막 남은 두 자본주의 강대국인 대영제국-영연방과 미국이 자본주의 세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여 자멸할 것이고 소련은 이런 자본주의 국가들의 자멸 전쟁을 틈 타 국력을 다지고 세력을 키워 점차 유럽에서의 힘의 공백을 파고들어 유럽 각국을 적화하고 궁극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양대 강국인 영연방과 미국의 파멸 이후 전쟁에 지친 노동자들을 계몽-규합하여 전세계 사회주의를 달성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애초에 유럽을 내버려둔다는 것이 순수한 자국방어적인 것이 아니라 "어차피 영국과 미국 둘 다 서로 싸우다 망할텐데, 우리는 굳이 여기서 힘 뺄 필요 없이 그때까지 힘을 쌓으며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이 소련의 기대와는 다르게 미국에 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닌 패권투쟁을 포기하고 미국에 최대한 협조하는 쪽으로 노선을 굳힌 이상 결국 어떻게 됐든 간에 미국과 소련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세력권을 미국이 존중할 것(=미국이 위협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것은 소련이 독일과 직접 수많은 인명을 투입해 싸운 것을 미국이 인정해줄 것이라는 생각과 어차피 미국이 이길 수 있을 상대적으로 약소한 소련에 미국이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안일한 발상이었다. 실제로도 소련이 미국보다 상대의 존재 그 자체로부터 위협을 더 크게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전후 국력 차이가 극심했고 소련의 관점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침공한 [[러시아 내전]]의 기억이 소련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마셜 플랜에 대한 대응이 과격해졌다. 소련 입장에서 자신들은 궁지에 몰린 쥐였다. 반면 미국은 [[아일랜드 내전]]과 [[스페인 내전]], 그리고 [[뮌헨 협정]]의 교훈을 상기하면서 서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빈곤 속에 혼란에 빠지게 둬서는 안 되며 또 다른 독재 국가인 소련과 적당히 타협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 즉, 미국과 소련의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과 다르게 미국은 소련이 전쟁 이전의 영역을 벗어나 중부 유럽까지 점령한 것 그 자체를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였으며 상기한 소련의 체면치레성 지원들을 보며 소련이 기만 전술을 펼치고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미국은 소련의 반발을 무릅쓰고 엘베 강과 독일-체코 국경, 그리고 [[아드리아 해]] 서쪽의 국가들을 자유 국가들로 확고히 다지기 위해 서유럽과 북유럽, 남유럽 각국에 마셜 플랜을 강행하였고 이는 본격적인 냉전의 시작을 야기했다. 즉, 전후 소련의 자국과 자국의 정책에 대한 판단과 미국의 소련과 소련의 정책에 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야기된 미국의 소련에 대한 불신이 마셜 플랜을 야기하여 냉전의 시작을 촉발한 것이다. 한편 이렇게 마셜 플랜을 기점으로 시작된 냉전에 소련이 정면으로 대응하고, 더 나아가 때 맞춰 1949년 성공한 [[소련의 핵개발]]의 흐름에 올라타 냉전이 더더욱 심화되고 복잡화된 것이 결국 [[소련 붕괴]]의 시작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어떻게 보든 결국 마셜 플랜이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승리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 자체는 분명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